영국에 머물면서 가장 오랫동안 적응이 어려웠던 부분 중 하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부터 직장 동료, 카페 직원, 택시 기사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표정 변화가 거의 없고,
말투도 일정하게 조용하고 차분한 편이었다.
겉으로는 무례한 행동이 없지만, 그 안에 감정이 실려 있다는 느낌을 받기란 쉽지 않았다.
한국이나 다른 문화권에서는 기쁨, 분노, 불편함, 호감 등이 말투나 표정, 심지어 몸짓에서 비교적 쉽게 드러나는 편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기쁜 일이 있어도 겉으로는 그저 “Nice” 정도로 정리하고,
불쾌한 일이 생겨도 별다른 표정 없이 조용히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글에서는 여행자로서 경험한 영국인의 감정 표현 방식, 그리고 왜 그들이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지에 대한 배경을 함께 정리해보려 한다.
기쁨도, 불쾌함도 ‘드러내지 않는 게 예의’
영국에서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솔직함’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 침범’으로 여겨질 수 있다.
기쁘거나 흥분되는 상황에서도 그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조용히 웃으며 한두 마디 말로 정리하는 방식이 훨씬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생일 축하를 받을 때도 한국처럼 감격하거나 활짝 웃는 모습보다는 작게 웃고 “Thank you, that’s kind of you”라고 말하는 정도다.
특별히 감정을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가 진심을 알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감정을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다.
불쾌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불편한 서비스를 받았을 때나, 누군가 무례한 행동을 했을 때 즉각적으로 항의하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대신, 표정 없이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나거나, 짧고 정중한 말로 상황을 마무리한다.
이런 방식은 겉으로는 공손해 보이지만, 상대방이 지금 어떤 감정 상태인지 알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감정은 관계가 쌓인 후에야 천천히 열린다
영국에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굉장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여겨진다.
누군가에게 감정을 보여준다는 건 곧 자신의 사적인 면을 공개하는 것이고,
그건 충분한 신뢰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삼가야 할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도 처음부터 감정적으로 가까워지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조금씩 거리감을 좁혀가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대화를 나누는 횟수가 늘고, 그 안에서 상대의 스타일을 이해한 뒤에야
조금씩 본심이나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처음에 현지 동료들과 어색한 느낌이 풀리지 않아 고민했지만,
몇 주 후 그들 중 한 명이 “사실 너랑 이야기하는 게 점점 편해지고 있어”라고 말해줬을 때,
그 말이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감정 표현이 적은 대신, 한 번 드러낸 감정에는
더 깊은 신뢰가 담겨 있는 문화라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다.
표현 대신 선택하는 건 ‘조용한 공감’
영국인들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더 조용하게 관찰하고, 필요한 순간에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을 때, 굳이 “무슨 일이야?”라고 묻기보다는
“티 한 잔 할래?”처럼 감정 대신 행동으로 위로를 전하거나,
너무 힘들지 않게 혼자만의 시간을 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런 태도는 말로 감정을 주고받는 방식과는 다르지만,
상대의 감정을 알아채고도 간섭하지 않는 섬세한 거리 유지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이 처음에는 이런 조용한 분위기에서 정서적 단절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조금만 시간을 두고 머물다 보면, 말보다 행동, 표정보다 간격으로 전해지는 영국식 감정 표현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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